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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세손 덕산파 천배
면면(綿綿)한 한줄기 혈통이 흐르고 흘러 일천의 연륜(年輪)을 자랑하는 한 그루의 거목(巨木)은 부단(不斷)한 시련과 악천후(惡天候) 속에서도 성장 번창하여 오늘날 교동인씨의 화수(花樹 : 일가들)는 정정(丁丁)한 모습으로 전 강역(全疆域)에 힘찬 가지를 뻗고 잎을 피워 양양한 앞날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동일 시조를 모신 후손된 자로서 어찌 동경자축(同慶自祝)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이번에 대동보를 간행함에 있어 그 감회는 깊고 새로운 바 있습니다.

기원(起源)없는 강하(江河)가 없고 근간(根幹) 없는 수목(樹木)이 없겠거늘 인간된 도리로 그 조상을 바로 알고 받들어 모실 줄 모른다면 떳떳할 수 없는 일이요. 다시없는 부끄러움이라 하겠습니다. 시대가 바뀌고 문물제도가 달라지고 외래사조가 아무리 범람(氾濫)하는 당세(當世)라 할지라도 우리의 전통과 미풍양속은 길이 계승되어 나아가야 할 것이며 이번 대동보 간행의 참뜻도 여기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상이 사적과 계보(系譜)를 바로 알고 그 유지(遺志)와 유업을 이어받아 발전시키매 앞날에 있어 더욱 큰 화수지의(花樹之誼)와 돈목(敦睦)과 단결을 위해 더 크게는 국가 민족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돌아보건대 지난번 대동보가 발간된 것은 병자년(서기 一九三六年)의 일로서 어언 二十七年이란 세월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二十七년간이란 길다면 길겠습니다만 불과 一세대에 해당하는 연월(年月)인데 그동안 격변하는 국내외 정세에 휩쓸려 우리 민족은 어느 시대에 있어서 보다도 큰 수난(受難)을 거듭하여 왔습니다. 따라서 대동보 간행문제가 꾸준히 논의되고, 추진되어 왔음에도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절박(切迫)하고 다난(多難)했던 까닭으로, 지금껏 결실을 보지 못하고 지연되어 온 것으로 압니다. 이번 대동보를 발간함에 있어 크게 유감스럽고 심통(心痛)한 것은 명실상부한 대동보가 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휴전선 이북에 계신 종친들의 계보를 정리 수록할 방도가 없음이 그 첫째요, 월남하신 종친들 역시 그 친족 혈육 간에도 대부분 분리 산재하여 정확한 계통과 생존여부조차 확인할 길이 막연하여 부득이 누락케 된 것이 그 둘째 이유입니다.

오직 민족의 대과업인 조국통일이 조속히 성취되어 다음 대동보 편찬시에는 이런 불행이 다시없기를 기원하는 심정 참으로 간절합니다. 누락된 종친 여러분께 송구스런 마음 금치 못하며 미충(微忠)을 양찰(諒察)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끝으로 우리 교동인씨의 전도(前途)에 길이 영광 있기를 축원하면서 이 사업을 이룩하기에 직접 편집과 업무에 참여하신 여러분과 시종 협조를 아끼지 않으신 종친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62세손 면천파 월환
생각하건대 우리 인씨의 족보가 있은 지가 옛 무자년에 비로소 창간한 뒤로부터 지금의 임인보(壬寅譜)에 이르기 까지 六회를 속간(續刊)하여 二백년에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우리 일가의 성대한 일이 아니냐. 역대(歷代)의 선조께서 옛과 지금의 문헌을 찾아내어 윗대의 그윽이 감추어져 있던 사적을 밝혀낸 것이 정밀하고 또한 훌륭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五회 병자보(丙子譜) 때에 시대의 변천(文明發達)으로 인하여 간행된 서적들이 전에 비해 백배였으며 또한 그때에 집안의 여러 선현(先賢)들께서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으시고 널리 옛과 지금의 사적을 찾아서 상계(上系)의 착오(錯誤)된 것을 고치시고 또 전대(前代)에서 미치지 못했던 사적까지 증보(增補)하셨으니 가히 그 공이 막대(莫大)하였다고 이를만 하였다.

슬프다. 병자년의 족보한 지가 二十七年에 불과하여 비록 해가 오래되지는 않았으나그간에 여러 번 난리를 지내오매 각 집안의 가졌던 보첩(譜牒)이 유실되어 갖고 있지 못함이 적지 않고 또 八.一五광복후로 묘소를 옮긴 것이 허다케 되었으니 이대로 장차 해가 오래됨에 이르면 능히 모두 보첩에 기록할 수 없음이 적지 않을 것이므로 지난 기해년 겨울에 불초가 학식은 없으되 외람되고 주제넘음을 불고(不顧)하고 면천, 당진, 덕산의 여러 일가와 함께 다시 발행할 것을 의논하니 찬동하지 않는 이가 없으므로 곧 각파(各派)에 발문(發文)코져 하였는데 갑자기 경자년과 신축년 두 해의 전국 혁명(四.一九와 五.一六革命)을 만나서 거의 좌절케 되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성심으로 합하여 진 것은 밖의 흔들음도 능히 깨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음해 봄에 다시 여러 유사(有司)와 함께 적극 추진하여 마침내 능히 결실케 되니 이보다 더 다행함이 없다 하겠다.

이번 족보하는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일은 일찍이 선조께서 고려말에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갔었다는 말은 들었으나 가히 확실히 알지 못하므로 널리 경향(京鄕)의 문헌을 찾았더니 교정유사인 담양 일가분 남기(南基)씨가 말하기를 “전남 담양국씨(鞠氏)집에 있는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의 글중에 우리 선조의 호(別號)가 있다”하므로 곧 가서 온수감인선생(溫水監印先生)과 직절인선생(直節印先生)이라고 쓰여 있음을 등본해 오고 또 교정유사인 덕산일가분 명수(明洙)씨가 가져온 두문동 七十二賢 명단록(杜門洞七十二賢名單錄)에도 또한 인유장(印有章), 인문명(印文明)이라는 두 분의 이름자가 있었는데 어느 별호가 어느 분의 이름인지 알 수는 없으나 족보 간행의 기일이 절박(切迫)함으로 인하여 자세히 고증하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아직은 변의(辨疑)의 끝에 수록(收錄)하여 후세의 석학(碩學)에게 기대코자 하는 바이다. 탄식하노라! 이 같은 두 분의 높은 절개와 아름다운 사적이 오랫동안 없어졌다가 이제야 겨우 백세(百世)후에야 현창(顯彰)케 되니 이는 실로 우리 집안의 다행이요, 남기(南基), 명수(明洙) 두 종인(宗人)이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한 공로라 하겠다.

또 같은 조상의 자손에 있어 거의 수록하였으나 다만 북한에 있는 여러 일가들의 길이 막힘으로 인하여 능히 함께 족보하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가히 한탄되도다. 무릇 사람이 선조의 이름자(諱字)와 사적에 어두운 것은 그 보첩을 보지 못한 연고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번의 족보는 보책(譜冊)을 발간하여 펴고자 계획하나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대동보(大同譜)를 발간하는 즈음에 겸하여 파보(派譜)를 만드노니 오직 원하건대 여러 일가는 집집마다 받들어 모셔서 연구하여 보기를 태만히 하지 않는다면 효도와 공경과 돈목(敦睦)의 마음이 절로 생겨서 거의 족보를 하는 대의(大義)를 저버리지 않게 될 것이리라. 불초가 외람되이 족보하는데 총무의 책임에 참여하여 별로 대과(大過)없이 큰일을 잘 마치었음은 실로 유사(有司) 및 각파(各派) 여러 일가의 협력이 많았음이니 우리 집안의 다행이요, 불초의 영광이라 돌아보건대 불초가 글을 못하므로 덧붙여 쓸 수 없으나 가히 전말(顚末)을 간략히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에 감히 삼가 써서 이와 같이 이르는 바이다.

 

 

63세손 면천파 치명
천지지간 만물지중에 오직 인간만이 가장 귀(貴)하다 하였으니 그 극히 귀함을 자랑하는 인간은 국가 사회 가정 모든 면에 있어서 오로지 윤리 도덕에 몰각(沒却)됨이 없이 행하는 바 있기 때문이다, 자고(自古)로 보법(譜法)을 세워서 족보를 이루게 된 것은 구족(고조 증조 조부, 父와 자신, 아들 손자 증손 현손을 뜻함)과 지친으로부터 종족(宗族)에 이르러 영원 무궁하게 발전 번영하여 가는 내력과 사적을 밝혀서 百대千손의 시원(始源)과 일원천파(一源千派)의 파계(派系)를 알게 되고 소목(昭穆)의 고하원근(高下遠近)을 살펴서 엄정한 항렬(行列)의 차서(次序)를 세우며 친화(親和)한 종족(宗族)의 돈목(敦睦)을 더욱 굳게 함에 있으니 이 어찌 아름다운 제도가 아니리요, 아무리 現사회의 외래사조가 범람하여 악풍조의 험난한 세태일지라도 뜻 있는 인사로는 반드시 사람된 도리와 근본을 망각하지 아니하고 우선 위자손(爲子孫) 사업의 전통을 고수(固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조의 유지(遺志)와 유업을 이어받아 이제 이루어지게 된 우리 교동인씨세보 제六회 중간(重刊)의 의의는 중차대(重且大)하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자보(戊子譜) 창간이후로부터 근 二백년간 누차 중간(重刊)된 보첩을 상고(詳考)컨대 족보를 이루기에 선조의 사적과 세계(世系)의 미흡한 점에 있어서 더 밝혀서 수정(修正)하기를 후대에게 지칭(指稱)하신 바 있었으나 이번 족보에도 또한 흡족할 정도가 못되었음은 유감스런 일입니다.

우리 씨족은 고려 신라시대에 혁혁하게 살아오던 바 二十一세조 휘 원보(元寶 : 함산군)께서 이태조 등극 당시 최영에 합세하여 절의(節義)로써 항거하시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이후 향토(鄕土)에 숨어 살기를 시작하여 점차로 잠적(潛跡)되어 온 사실을 다시 밝히고자 하오며 흥진비래(興盡悲來)와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이치의 자연이므로 우리의 앞날에는 반드시 많은 영광이 있을 것을 믿으면서 마음 깊이 기원하는 바입니다. 금번 임인보 발간의 경로를 대략 살펴보건대 무술년 중추(仲秋)에 면천파종회에서 발기추진위원회가 탄생한 후 三개 성상의 시일을 통하여 많은 애로를 타개하고 신축년 정월에 덕산, 면천, 보령 三파가 모여 확대추진위원회를 결성하므로 호전되어가던 바 파란중첩의 五.一六혁명은 정세의 변화를 가져왔으므로 부득이 관망하던 중 재수습 추진하여 임인년 봄 三월에 전국대종회를 당진에서 개최하였으나 이것도 또한 당국의 집회 불허로 다만 비공개 회의로써 보사규약 및 협의 사항의 통과를 보아 마침내 소망의 대동보사(大同譜事)를 이루게 되었으며 첨종의 부단한 성원과 협조로써 만난을 배제하고 노고한 결정(結晶)은 이제 곧 대동보 발간을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초가 자초지종 참관하여 미력을 다하였으니 천박(淺薄)한 소치(所致)로 보람있는 일이 되지 못하였음을 송구하게 생각하면서 외람(猥濫)하게도 두서없는 우지(愚志)와 전말(顚末)을 적는 바입니다.

 

 

62세손 순창파 남기
우리 인씨의 족보는 듣건대 영조 무자년에 시작하여 순종 경술후 병자년에 이르기까지 五회나 다시 간행하였고, 병자년으로부터 금년 임인년에 이르기까지 二十七년의 오램이 되었으니 속간(續刊)하는 이 일이 비록 세상이 평화하더라도 오히려 늦거든 더구나 역사를 지내온 이래로 일찍이 있지 않은 대란(大亂)을 지낸 끝이랴. 이로부터 면천 덕산의 두 파(派) 일가들이 여러 차례 의논한 끝에 먼저 주창(主唱)을 하매 여러 종중이 합의하여 드디어 보소를 설치하매 우리 일가의 전체가 응하지 않음이 없었고 책임을 맡은 유사(有司)도 정성껏 힘쓰지 않음이 없었으며 다행히도 총무 월환(月煥)씨께서 이에 전무(專務)하매 고생과 가시밭의 수고를 하심을 보고 이에 조그만(蠅頭) 정성으로 만분의 일이라도 돕고져 하여 남기(南基)같이 어리석음으로도 또한 교정(校正)과 고증(考證)의 역할에 시위소찬(尸位素餐)처럼 참여하여 一년여를 지나매 끝마침을 고(告)하게 되니 그 규모와 조례(條例)는 한결같이 구보(舊譜)에 의(依)하였으며 혹 조금의 덜고 더한 것은 가히 시의(時義)에서 아니할 수 없는 것만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말을 하건대 우리 인씨가 고려에서는 혁혁하여 대대로 덕을 일컫고, 금자광록(金紫光祿 : 正一品)이 서로 이었으나 이씨조선에 와서는 벼슬이 훌륭치 못하였고 나가기는 어렵고 물러남은 쉬웠으나 융성하고 막히는 이치로서 그러한 것이냐? 그러나 오직 조상의 법을 독실히 지켜서 잃지 않는다면 오래 굽혔던 것이 장차는 크게 펴질 날이 있으리니 이것은 먼저는 안 되었다가 후에는 기쁘게 되리니 일가들은 어찌 서로 축하하며 서로 힘써하지 않으랴. 다만 먼저의 수보(修譜)는 전국을 총괄하여 혹 누락이 없었으나 지금은 남과 북녘이 불통하여 남한은 합하였으나 북은 합하지 못하게 되니 이것이 가히 한탄케 된다.

슬프고 슬프다! 우리의 득관시조(得貫始祖 : 휘 邠)께서는 고려 때에 벼슬이 한림학사 문하시중이었고 호가 초당(草堂)이요,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신데 문장과 행하신 업적이 세상 선비의 종주(宗主)가 되었더니 함창으로 귀양가셔서 그 곳에서 돌아가셨고 그 곳에 묘소하시니 그 후로 여러 백년이라 자손이 전국 팔역(八域)에 흩어져 살매 향사(享祀) 모시는 도리와 묘소의 구비하여야 할 범절(凡節)을 후손의 성력(誠力)이 이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할 것이로되 지금까지 완비치 못하였으니 근본을 보답하고 계승하는 도리가 어디에 있다고 하겠느냐. 오늘날에 있어서 다시 하나로 합하여 수보(修譜)하였으니 족보에 참여한 분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성껏 힘을 내서 제사 모심과 묘소의 갖춤을 실로 마땅히 힘써 해야 할 것이니 그 근본을 두텁게 하면 그 끝이 창성함은 하늘의 이치와 기운인 것이다. 수달피도 오히려 근본을 보답할 줄 알거늘 더구나 사람이랴. 엎드려 원하노니 여러 일가들은 조상을 숭배하는 정성을 분발하여 이제부터창안(創案)하여 후에 끝마침이 있게 된다면 생각건대 우리 조상의 하늘에 계신 영혼께서 반드시 말하기를 “나에게도 후손이 있어서 옛터를 버리지 않는다”할 것이니 조상의훌륭(祖武)함을 이어가서 막힘이 없이 이끌어 나간다면 자손이 보존되고 하늘의 도움을 받을 것이니 이것이 나의 소망이요 이에 서문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