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는 봉약(封若), 號는 초당(草堂)이며 詩號는 문정(文貞)이다. 예종·인종 연간에 활동한 문인으로 인종 때 급제하여 한림학사·문하시사(門下侍史)를 지냈다.
작품은 『동문선』에 시 3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5언율시 〈비오는 밤에 회포가 일어(雨夜有懷)〉 〈동도회고(東都懷古)〉 〈징현국사의 영당에서(澄賢國師影堂)〉이다. 『파한집』에는 경기도 고양의 소화사(小華寺) 남쪽 누각 벽에 그가 쓴 시의 2구가 전한다.
인빈은 고려의 시화집에서 빠짐없이 거론되고 있어 당시의 주요 문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시 〈비오는 밤에 회포가 일어〉로 인빈의 명성이 해동에 떨쳤다고 하였다. 이 시에 대해 서거정은 『동인시화』에서, 이태백과 소동파의 시에 못지않게 즉경을 잘 묘사하였다고 칭송하였다. 최자의 『보한집』에도 고려를 빛낸 대표적 문인 중에 들어 있으며, 이제현의 『역옹패설』에서는 중화(中華)의 풍도를 지닌 현사명신(賢士名臣) 중에 포함시켰다.
인빈은 교동 인씨(喬桐印氏)의 실제 관조(貫祖)이다. 교동 인씨는 시조 진(晉)나라 풍익대부(馮翊大夫) 인서(印瑞)가 신라에 와서 살게 된 이후 33세 인빈이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 교수는 강화도 교동)에 봉해짐으로써 본관을 교동(喬桐)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경기도 고양 남쪽 호숫가에 초당을 짓고 살았으며 경상북도 상주에서 별세하여 이곳에 묘가 있다. 1891년(고종 28)에 정의묵(鄭宜默)이 쓴 인빈의 묘갈명이 있고, 1996년에 상주에 신도비가 세워졌다.
력옹패설에 의하면 公께서는 예종 인종간의 名臣賢士(명신현사)중의한분으로서 문장과 행동이 당대 선비의 으뜸이셨다. 公의 五言律詩(오언율시)가 파한집 및 동인시화, 동국문선에 실려져 있는바 이인로와 서거정선생은 높이 평가하여 이태백과 소동파에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公께서는 고양군 남쪽 十五里(십오리)지점 호수가에 초당을 짓고 사셨으며 부근의 소화사 남쪽 누각에 친필로 된 한시를 남기셨다고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이는 파한집과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양군편에 기재되어 있다) 서기 1506년경에 형조판서 蔡紹權(채소권)께서 고증하시기를 "인빈公께서는 고려의 學士로서 함창(경북상주의 고을)에 귀양오셔서 돌아가시매 그 후 자손들이 함창에서 살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公의 묘소는 현재 경상북도 상주군 이안면 석현리에 있다.
파한집 下권(제三권)초역
草堂秋七月 초당에서 추칠월을 맞는데
桐雨夜三更 오동나무에 비오는 야삼경이로다.
欹枕客無夢 배겟머리 나그네는 잠못 이루는데
隔窓蟲有聲 창밖에는 벌레우는 소리
淺莎翻亂滴 짧은 잔디에는 물방울 어지럽게 번득이고
寒葉洒餘淸 차디찬 잎에는 맑은 기운 마저 뿌리도다
自我有幽趣 내게는 그윽한 정취가 있나니
知君今夜情 그대는 오늘밤 정취를 아는가
이것은 학사 인빈(印份 : 또는 邠)이 지은 것인바 학사 인빈의 이름이 우리나라에 떨치게 된 것도 이 시편 때문이다.
내가 전에 계양부(桂陽府 : 지금 부천군임, 옛 부평군관내로 이인노가 二十九세때 桂陽府錄事로 있었음)에 관원(官員)으로 있을때 하루는 배를 지어 공암현(孔岩縣 : 지금 김포군에 속한 옛 陽川縣관내)에서 행주(幸州)의 남쪽 호수에 이르러서 보니 깎아지른 언덕이 버섯(笟)같은데 그 옆에 소나무와 떡갈나무 八~九 그루가 빽빽히 들어섰고 무너진 담장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지나는 사람들이『이곳이 인공(印公)의 초당이 있던 옛터』라고 하였다.
내가 배 떠날 준비를 하고서도 차마 떠날 수가 없어서 왔다갔다 하면서 휘파람만 불다가 그 사람(印邠)을 회상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묵은 소로길을 찾아 소화사(小華寺)의 남쪽 누각에 올랐는데 벽 위를 보니 시(詩)가 있는데 이끼가 얼룩덜룩하게 끼어 먹 자국만 겨우 남아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바로 인공(印公)이 쓴 글이었다.
즉 『파초(芭蕉)잎이 발 밖에서 우니 산이 비가 내림을 알겠고 돛대가 산봉우리 위에 솟으니 바다에 바람이 부는 것을 보겠도다』라고 하였으니 가히 명성을 떨친 이름아래에는 헛소문난 선비가 있을 수 없다 하겠노라.
〔譯者註〕
破閑集著者 李仁老 약력
호는 雙明齋 고려 明宗때 한림원에서 十四년간 재직했고 여러 顯職과 寶文閣學士까지 지냈다. 고려 三大시인의 한 분으로 이 책은 신라때부터 고려 인종때까지의 작품을 평론하고 혹은 중국 역대시인과도 비교 논설하였음.
력옹패설(櫟翁稗說) 초역 - 이제현 지음
고요한 나라(靖國 : 즉 우리나라)의 안화사(安和寺는 개성 북쪽 송악산 자하동에 있고 예종이 창건한바 宋의 顯孝皇帝가 佛像과 啣筆扁額을 내렸던 당시의 高刹)에 예종(고려十六대임금)이 지은 당률사운시(唐律四韻詩) 한 편이 돌에 새겨져 있다.
그 후면에 태자(太子) 아무가 글씨를 썼다고 한 것은 인종의 이름이다. 이때에 왕과 태자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학문에 힘썼고 우아한 선비들을 찾아 맞아들였다. 이에 윤관(尹灌), 오연종(吳延寵) 이오(李
) 이예(李預) 박호(朴浩) 김연(金緣) 김부일(金富佾) 김부식(金富軾) 김부의(金富儀) 홍관(洪灌) 인빈(印份 : 또는 邠) 권적(權適) 윤언이(尹彦頤) 이지저(李之氐) 최유정(崔惟淸) 정지상(鄭知常) 곽동순 임완 호종단(胡宗旦) 등의 명신(名臣)과 어진 선비들이 조정에 모여서 시(詩)를 짓고 토론하여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아니하니 중국의 풍모(風貌)가 있었다. 후세에서는 따르지 못할 것이다.
「譯者註」 력옹패설 著者 李齊賢 약력
호는 익재 또는 력옹으로 진현관제학과 공민왕때 정승을 지냈고 編年綱目과 忠烈 忠宣 충숙왕의 실록을 지은 고려 三대 시인의 한 분으로 이 「력옹패설」은 역사와 인물 경륜을 말하고 아울러 詩文 서화 등에 걸쳐 평론한 책으로 충혜왕때 지었음.
서사가시화 초역(초당공휘 빈) - 사가 서거정 지음
이태백은「삼양감추시」에서『어느 곳에서 가을 소리가 들리는가 소소한 북창의 대나무 숲이로다』라고 하였고 소동파는 수옥정시에서『높은 산에는 붉은 태양이 내려오는 듯하고 깊은 골에서 슬픈 바람이 이는 듯 하구나』라고 하여 능히 즉경을 그려내었으나 인학사 빈은 우야 유회시에서『초당의 가을 七월에 오동나무에 비가 내리고 밤은 삼경일세. 베개에 의지하여 손님은 잠 못 이루는데 창을 사이하여 벌레소리 처량하누나』라고 하였으니 그 맑고도 새롭고 아름다움이 위의 두 노대가에 지지 않는다 하겠다.
「譯者註」
作者 徐居正약력 조선세종二년生
左贊成 達城君 시호 文忠公 호四佳 東文選 동국통감 四佳集 등 編著
共著로는 經國大典과 東國輿地勝覽
六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다섯 번이나 재상
二十六년간 文衡(문형 : 弘文館 藝文館의 兩館大提學)
고려한림학사 초당 인공 묘갈명
교동인군 관국(觀國)이 나와 함께 친하게 지냈는데 하루는 세보(世譜)를 가지고 와서 그의 먼 조상이신 초당공의 사적을 말하며 나에게 묘비명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위선사에 사양할 수 없어서 받아서 펴보니 공의 이름은 빈(邠)이시고 자(字)는 봉약(封若), 초당(草堂)은 별호였다. 고려 인종때에 문과에 급제하시매 이 과거에서는 명사들이 많아서 그때의 사람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하였다. 인종때에 한림학사와 문하시중이였고 돌아가시매 함령(咸寧 : 지금 상주군 함창면) 서쪽 라한동(지금 라한산) 손향(동남향)이시다. 공께서 때를 잘못 만나 함창으로 귀양오셨다가 돌아가지 못하였다. 후손이 있으니 고종때에 이르러 五대손 대신(大紳)과 六대손 공수(公秀)가 벼슬이 모두 훌륭하였고 八대손 당(璫)은 공민왕때에 석성부원공에 봉(封)해졌다. 또 내려 와서 十代손에 이르러서는 영보(榮寶)와 중수(重秀)와 인기(仁奇) 세 형제가 또한 훌륭한 명예를 얻었고 이씨조선에 들어와서는 사휴(仕休)가 참찬관(叅贊官)이요 복용(福庸)은 예문제학(藝文提學)으로서 이에 더욱 현달한 후손들인 것이다. 그 이하는 많으므로 모두 기록치 않노라. 인씨의 성이 교동에서 나왔는데 시조의 이름은 서(瑞) 로서 진(晉)나라 혜제때 신라로 사신을 나왔다가 교동백에 봉해졌었으니 우리나라에 인씨가 있음이 이로부터였고 八백년을 내려와서 고려때(勝國)에 의(毅) 양(亮) 숙(淑) 三대가 연이어 인종을 섬겨서 벼슬이 모두 훌륭하였으니 이분들이 즉 공의 아버지요, 조부요, 증조이신 것이며 공도 또한 교수부원군(A喬樹府院君)에 봉해져서 후손들이 인하여 교수(喬樹 : 즉 喬桐舊號)로써 본관을 얻게 되었다. 다행히 쌍명재 이인노(李仁老)와 사가 서거정(徐居正)께서 공의 추우시(秋雨詩)를 기록하여 훌륭하다고 찬양 하였으니 이들 두 분은 모두 대문장가로서 앞뒤의 세대에서 이름이 쟁쟁하였던 분들이시매 이 분들의 말씀을 빌건대 이태백과 소동파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찬양하였으니 이로써 족히 공의 사실을 증거하여 쓰노라. 묘갈에 명(銘)하여 이르노니,『한 점의 고기로 솥 전체의 맛을 알 수가 있고 금싸래기는 많지 않은 분량이라도 귀한 것이다. 천년의 후세에서도 알아주는 이가 있으니 두 분의 이름난 노대가(이인노, 서경덕)들이로다』내가 용렬하나 공의 묘갈명을 씀에 있어서 사실에 따라 쓰노라.
고종二十八年(서기一八九一년) 신묘유두절재생명(六월十六일)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경 경연춘추관 수찬관 참찬관 진양 정의묵 지음
서기一九八三年五월十五일改竭 喬桐印氏大宗會 謹立
〔註〕: 비문중 世系는 現行七回世譜대로 修正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