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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을과시험 합격 교지

[무과] 인조(仁祖) 14년 (1636) 병자(丙子) 별시(別試) 을과(乙科) 24위 절충장군(折衝將軍)

 

*兵馬萬戶 顯信校尉 印楚璿公 行狀 (병마만호 현신교위 인초선公 행장)

손안에 꽉차는 구슬은 반드시 곤륜산에서 캐내고 잘달리는 천리마는 반드시 기주(冀州)로부터나온다 한다. 그러므로 단술샘이 반드시 근원이 있고 지초(芝草)는 그 뿌리가 있다 하는데 과연 公께서 그러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고려에 들어오매 諱 인빈公이 계셔서 문장으로써 세상에 울렸었고 별호는 초당(草堂)이시니 이분이 公의 먼 조상이요, 임진왜란에 이르러서 익사공신이신 인치명公(印致明公)의 아드님 이시다.

公의 이름은 초선(楚璿)이요 字는 여제(汝濟)이시니 선조 병오년 7월 7일에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두리 본집에서 나시었다. 천품이 영리하고 재주가 비범하였다. 참됨을 기르고 맑음을 깊이 하시매 간사한 사물은 눈에 가까이 하지 않으시고 속된말은 입에 올리지도 않았으며 물욕과 화려한 것은 알려고도 하지 않으셨다. 항상 사람들 대하시매 어진뜻이 외모에까지 나타났고 재주는 문무를 겸하여 가장 병서(兵書)읽기를 좋아하시매 항상 새벽과 저녁으로 쇠소리를 내어 읽으셨으나 남들은 그 소리가 듣기 좋음만 알았지 어느책을 읽는지 그 뜻을 알아듣는 이가 없었다. 인조 대왕때 용호방(龍虎榜 즉 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고을의 찰방을 봉직하시매 은혜와 위엄을 함께

베푸사 원근이 모두 칭송하였고 일만사람의 입이 비석을 이루었다.

순치(順治) 18년에 현신교위(顯信校尉)가 되어 경흥진(慶興鎭)을 지킬새 오랑캐를 다스리는 병마만호(兵馬萬戶)를 관장하셨고 인조병자년에는 호란(胡亂)을 갑자기 당하매 백번 싸운끝에 형세가 궁하고 힘이 굽혔으되 병기(兵器)가 없어지게 되매 이르러서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호위하고심양에 인질로 억류되어 여러해를 지내시매 주야로 충성을 다하여 온갖 고생을 맞보셨으니 일찌기 개자(介子)가 다리를 깎었다 함이 혼자서만 옛날에 훌륭하였던 것이 아니고 인옹(印翁)의 저항정신을 오히려여기에서 지금 다시 보겠도다. "의관(衣冠)이 만리밖에서 모습이 늙었고 명절은 천추(千秋)에도 해와 달빛같이 걸려있구나." 라고 한 글귀가 감히 이를 이름이로다.소현세자를 모시고 돌아올제 압록강에 이르러서는 슬픈 낯빛으로 동료군관이었던 김여준(金余俊)의 월명비안지곡(月明飛雁之曲)을 회상하고 시(詩)를 읊어서 이르기를 "용이 일어나면  진(晉)나라의 물이 맑음을 듣게 되는데 말의 머리가 오늘은 동으로 향하여 가누나. 심양땅의 바람과 눈속에서도 몸은 오히려 건장하니 한양의산천에 눈빛이 다시 밝아지리. 한밤중에도 와신상담을 어찌 감히 잊으랴! 지나온 해의 가진 절개에 또한 능히 살아서 돌아오네. 월명비안지곡에 화답코져 하며 고인은 보이지않고 눈물만이 갓끈을 적

시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일찌기 심양에 갔던 동료 김여준이 부른 월명비안지곡으로서 자리에 앉았던 여러사람이 눈물을 흘렸으니 이제 그 사람은 불행이도 이미 죽어서 함께 돌아오지 못함으로 눈물이 갓끈을 적신다고 하였음이니 늠름한 그 기상과 슬픈 그 정이 시 가운데에 넘쳐서 후세사람으로 하여금 상상하매 비록 천품이 남보다 달랐다 하나 또한 가풍에서 절로 나온 것이니 사람들이 이르기를 "한(漢)나라의 충무공이 가히 그 훌륭한 아들이 있다" 고 한것이 오늘의 경흥공(인초선公)이 또한

가히 아들이 있다고 이를만 하도다. 아버지(인치명公)는 충의로써 남한산성에서 익사공신이었고 아들도 절개와 의리로써 심양까지 호종(扈從)하셨으니 한 가문의 충렬한 가풍이 지금까지 늠름하도다.

그후 효종대왕께서 그 충성을 천명코져 교시(下敎)를 내려서 여러번 부르셨으나 병환으로 가시지 못하셨으니  그 또한 하늘의 뜻인저!

그 후손 종화(種華) 종황(種黃)이 두분의 二대 문헌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한말씀을 청하므로 二대의 충절을 흠모하여 글을 못함에도 간략히 그 대개를 적어서 이르는 바이다.

海州 吳震泳 記 (해주 오진영 씀)

인원정(印源正)
어모장군(禦侮將軍)
인효강(印孝綱)
형조정랑(刑曹正郞),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
인승손(印承孫)
승의랑(承義郞)
인원손(印元孫)
선전관(宣傳官)
인수손(印守孫)
사도사 주부(司濤사 主簿)
인삼조(印三組)
내사판관(內寺判官), 선략장군(宣略將軍)
인삼석(印三錫)
어모장군(禦侮將軍)
인삼권(印三權)
공조좌랑(工曹佐郞), 형조참의(刑曹參議)
인시경(印時敬)
서주군수(西州郡守)
인인경(印仁敬)
삭주부사(朔州府使),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인신경(印信敬)
이조정랑(吏曹正郞)
인근(印瑾)
강서현령(江西縣令)
인각(印珏)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인승우(印承祐)
문과 급제, 호조참판(戶曹參判)
인사휴(印士休)
참찬관(參贊官) 정3품
인근(印瑾)
강서현령(江書縣令) 종5품, 공조정랑(工曹正郞) 종5품
인구(印球)
어모장군(禦侮將軍) 정3품
인성문(印聖文)
부호군(副護軍) 종4품
인성국(印聖國)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
인복용(印福庸)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종2품
인황(印潢)
대사헌(大司憲) 종2품
인매(인매)
통정대부(通政大夫)
인구손(印龜孫)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수(郡守)

온양 군수(溫陽郡守) 인귀손(印龜孫)과 개운포 만호(開雲浦萬戶) 김한문(金漢文)이 배사(拜辭)하니, 상이 인견하고 백성을 구휼하고 군졸을 위무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5장 B면

【영인본】 19 책 47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군사(軍事)

 

  

* 인구손(印龜孫)

통훈대부 군자감정(通訓大夫軍資監正 정3품)과 사도시 첨정(司導寺僉正)을

지내신 인철형(印鐵衡)公의 아드님이시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

주서(注書) 최정지(崔正知)의 따님이시다.

인종,명종대에 통훈대부 선공감주부, 온양군수, 홍주판관 등의 벼슬을 하셨다.

인충걸(印忠傑)
원종공신(原從功臣), 보공장군(保功將軍)
인송진(印誦珍)
원종공신(原從功臣), 만호(萬戶)
인성룡(印成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인사정(印士鼎)
어모장군(禦侮將軍)
인덕룡(印德龍)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인치명(印致明)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임진왜란(壬辰倭亂) 원종공신(原從功臣)
인발(印潑)

선략장군(4품 무관)을 지내셨고 임진왜란 때 정난원종2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선전관을 지내실 때 병자호란을 당하여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용전하다가 전사하시었다. 그 후 훈련원정(3품 훈련원의 벼슬)에 증직되시었다. 배위는 숙부인 김해김씨와 숙부인 파평윤씨 두 분이 계셨고 현재 충남 보령군 청소면에 모셔져 있다. 이 근방에 약 4백여 년을 계승하여 내려오고 있는 교동인문(그 곳에서는 오야골 인씨라고 부른다고 함)의 집성촌이 있다.

 

공의 이름은 발이시니 일찍이 나라위해 순국하는 절개를 품으신 분이다.

선조대왕 때에 선전관으로서 임진왜란을 당하매 공훈이 있어서 정난원종 2등공신의 녹권을 받으셨다. 또 병자호란에도 청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오매 임금께서 남한산성으로 피난케 되였는데 공께서는 난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곧 임금을 보호코자 가려고 하였으나 적군에게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룰 수 없으매 이에 눈물을 흘리면서 칼을 집고 곧장 전라도로 내려갔다. 병마절도사 김준룡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오늘날 임금께서 욕을 당함에 신하는 죽어야 마땅할 때를 맞았으니 원컨대 한 부대의 병력만 내주면 작은 정성을 이룰 수가 있을 것 같다"고 간청하였다. 이에 김병사가 얼굴빛을 고치고 손을 잡으면서 말하기를 "지금 적의 세력이 크게 창궐한데 의지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지체 되였는데, 그대가 고맙게도 와 주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함이로다." 하고 그날로 북을 쳐서 병사들을 동원하여 밤을 타서 급히 행군하매 때는 깊은 겨울철이라 모진 북풍에 눈비마저 혹심하여 수족이 모두 터졌다. 울면서 남한산성을 향하여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이제 나라를 위해 충성하자"고 사기를 북돋아 주매 병사들이 모두 감격하여 한사람도 뒤쳐지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수원 광교산으로 진군해가서 보니 그 때 다른 부대들은 이미 흩어져서 자취가 없고 공만이 홀로 전군으로서 크나 큰 적진을 꿰뚫고 나가 남한산성이 서로 바라보이는 곳에 진을 치게 되었다. 낮에는 대포를 쏘고 밤에는 횃불을 들게 하여 남한산성과 서로 호응할 수 있게 하여 수레바퀴와 같이 서로 돕는 형세를 하였고 때로는 날랜 병사를 풀어서 적을 치고 충돌케 하여 적의 목을 많이 베이매 적병들도 겁을 먹어 감히 가벼이 덤비지 못하였다.

이듬해 정축년(1637) 정월 초 6일에는 적진에서 구름이 낀 날을 이용하여 밀물과 같이 쳐들어왔다. 포성이 산을 울리고 방패와 창이 서로 부딪치고 화살이 바람과 비 오듯 하매 병사들이 모두 죽어서 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공께서는 이에 도끼를 집고 분발하여 충의를 다할 것을 외치매 모두가 감격하여 포와 화살을 일제히 쏘았다. 적들이 쓸어져서 즐비하게 되였으나 마침내는 적이 몰래 뒤의 고개를 넘어 상상봉을 점령당하매 사방으로 포위되어 화살이 비 오듯 하였다. 그러나 공께서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마지막 힘을 다하여 죽기로서 맹세하고 정병을 뽑아 진격하였다. 수백의 화살을 쏘매 하나도 맞지 않음이 없어서 적의 사상자를 많이 내었다. 공께서 활을 잡고 앞에 나서서 힘써 싸워 수백의 적을 무찔렀으나 차차 군사가 줄고 혹은 흩어지는 반면에 적세는 더욱 배나 몰려 내려왔다. 그래도 공께서는 홀로 얼굴빛을 변치 않았는데 이 때 좌우에서 화살이 떨어지고 탄환이 다하매 맨주먹으로 혼자 서서 호령하다가 마침내 돌아가시니 위대하고 장하도다.

'빠른 바람속의 굳센 풀'이라 함은 정녕 공을 두고 이름이로다. 그 후에 광교산의 중이 공의 명패(각패 : 조선시대 당하관의 벼슬아치들이 차던 호패)를 보고 부고를 알리매 가족이 울며 가서 수시케 되였는데 열기가 오히려 늠름하고 얼굴과 눈이 살아있는 것 같았으며 입었던 배자도 단정히 그대로였다. 모셔다가 충남 보령군 청소면 제동묘좌 언덕에 장례를 내었도다.

슬프도다! 공의 사적이 김병사의 사적 및 행장록에 밝혀져 있고 또한 공신녹권까지 받았으니 그 곧은 충성과 굳센 정신이 저와 같이 높고도 높으나 자손들이 용렬하여 이에 사적이 묻히게 되니 애석하도다. 지난 기미년에 진사 이수광등이 현감과 감영에 같이 글을 올려 임금께 알리고자 기도하였으나 끝내 포상과 증직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는데 그 때 선비들의 서명한 것과 전후의 장계가 지금도 자손의 집에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도산 진사 이의준 씀.

 

인몽승(印夢乘)
훈련판관(訓練判官)
인덕룡(印德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인방준(印邦俊)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선전관(宣傳官)
인원형(印元亨)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인원신(印元信)
통훈대부(通訓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
인해건(印해建)
통정대부(通政大夫)
인정진(印正珍)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인명구(印命龜)
부호군(副浩軍)
인홍명(印弘明)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인홍계(印弘契)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인홍헌(印弘憲)
통정대부(통政大夫)
인세룡(印世龍)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인유현(印有炫)
통정대부(通政大夫)
인만철(印萬喆)
가선대부(嘉善大夫), 용양위 부호군(龍糧衛 副護軍)
인명조(印命朝)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工曹參判)
인상구(印尙矩)
한성좌윤(漢城左尹)
인태장(印泰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인대관(印大寬)
어모장군(禦侮將軍)
인대청(印大淸)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
인기현(印起賢)
통정대부(通政大夫)
인시관(印時寬)
통훈대부(通訓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
인광화(印光華)
통정대부(通政大夫)
인이헌(印以憲)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菅)
인윤추(印尹樞)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인사도(印師道)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좌윤(限城左尹)
인명설(印命說)
가선대부(嘉善大夫), 절충장군(折衝將軍)
인기보(印起輔)
절충장군(折衝將軍)
인여삼(印如三)
선략장군(宣略將軍)
인여두(印如斗)
용양위(龍讓衛) 부호군(副護軍)
인정류(印廷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인봉속(印奉續)
선략장군(宣略將軍)
인채진(印采璡)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菅)
인희필(印熙弼)
강릉부사(江陵府使)
인언민(印彦敏)
천주교 성인 인언민
성인명 인언민 마르티노(印彦敏 Martin)
축 일 5월 29일
성인구분 복자
신 분 양반, 순교자
활동연도 1737-1800
※ 복자(복녀) : 가톨릭 교회가 시복(諡福, 복자로 추대함)을 통해 신자들의 공경의 대상으로 공식 선포한 사람
1737년 충청도 덕산 주래(현, 충남 예산군 삽교읍 용동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인언민(印彦敏) 마르티누스(Martinus, 또는 마르티노)는 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또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하여 상당한 학식도 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평소에 알고 지내던 황사영 알렉시오를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내 그에게서 교리를 배운 뒤, 한양으로 올라가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때 인 마르티노는 장남 요셉을 주 신부 곁에 남겨 두었으며, 얼마 뒤에는 차남을 유명한 교우의 딸과 혼인시켰다. 그러고 나서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집과 재산을 버리고 공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친척들이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자, 그는 이주하는 이유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친척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797년에 시작된 정사박해가 한창 진행되던 어느 날, 인 마르티노는 공주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을 밝히고, 천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한 뒤 옥으로 끌려갔다. 그런 다음 청주로 이송되어 심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감사의 명에 따라 다시 그의 고향을 관할하던 해미 관장 앞으로 이송되었다. 인 마르티노는 청주에서 받은 형벌 때문에 걸을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청주에서 해미까지 가는 동안, 조정 관리들이 이동할 때 사용하는 말을 타고 가야만 하였다. 해미에 있는 감옥에서 인 마르티노는 젊은 이보현 프란치스코를 동료로 만나게 되었다. 이후 그들은 언제나 서로를 권면하면서, 갖은 형벌과 문초와 유혹 아래서도 변함없이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러자 관장은 어쩔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인언민도 이보현과 같이 때려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형리들은 관례에 따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음식을 인 마르티노에게 가져다 준 뒤, 그를 옥에서 끌어내 매질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그들 가운데 하나가 엄청나게 큰 돌을 들어 그의 가슴을 여러 번 내리쳤다. 이내 그의 턱이 떨어져 나가고 가슴뼈는 부서지고 말았다. 결국 인언민 마르티노는 이러한 형벌로 죽음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9일(음력 1799년 1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마지막으로 매질을 당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차례 다음과 같이 되뇌었다고 한다.

“그렇구 말구. 기쁜 마음으로 내 목숨을 천주께 바치는 거야.”

인언민 마르티노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출처 : 천주교 굿뉴스 홈페이지]
 

▲ 고문으로 걸을 수조차 없게 된 인언민을 포졸들이 말에 실어 해미로 압송하고 있다. [그림 탁희성]

▲ 천주교 삽교성당 관할 순교자 인언민 마르티노 사적지에 있는 순교자 기념비

▲ 천주교 해미성지에 있는 3위 복자상(맨오른쪽이 인언민 마르티노)